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사회민주당 (문단 편집) === 전후 [[쿠르트 슈마허]]의 당수 취임과 기나긴 야당 시절 === [[제2차 세계대전]]에 나치 독일이 패망한 직후, [[1945년]] [[5월]] 외국에 망명했던 기존 사민당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쿠르트 슈마허]] 등 국내에 남아 계속 나치에게 저항했던 세력이 결합하여 미국과 영국 군정청의 승인 하에 [[하노버]]에서 당을 부활시켰다. 특히 [[영국 노동당]] 출신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가 독일 사민당의 재건에 우호적이어서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독일 패망 후 우파 정치 세력들이 좌충우돌하고 있던 시기에 사민당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당을 재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소련은 막대한 자금과 무력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동원하며 주도 면밀하게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장악해 나갔고, 각 나라 사정에 맞게 폭동 선동, 무력 점거, 언론 탄압, 군사적 압박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동유럽을 일거에 공산화해 나가고 있었다. 동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군사력과 자금력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동독 지역의 사회주의 정당을 장악해 갔는데, 미영프 점령 지역에서는 자금 동원 이외에는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사민당과 공산당 등 주요 사회주의 정당의 동서 분할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동독 지역 사회주의 정당은 소련이 직접 접수하고 서독 지역 사회주의 정당에는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자금 지원을 계속하여 간접 영향력을 미치거나 최소한 소련의 우호 정치 세력으로 잔존시킬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사민당의 경우,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소련의 영향력하에 오토 그로테볼이 동독 내 사민당 세력을 규합, 별도의 사민당 조직을 구성해 나갔고,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했다. 하지만 쿠르트 슈마허 등 서독의 사민당 지도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폭력과 폭동 등 공산당의 파괴주의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과의 통합에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결국 소련의 영향력하에 동독 지역 사민당은 단독으로 공산당과 합당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사회주의통일당]]을 구성해 사민당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한편 서부 독일에 잔존한 사회민주당은 [[쿠르트 슈마허]]의 주도 아래 하노버에서 재구성되는데, 나치 시절 지하 조직 형태로 유지되며 슈마허 중심의 권력 집중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회민주당이 당내 계파 싸움 등으로 무력하게 무너진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당수 슈마허에게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당헌에 명시된 당수의 권한을 떠나서 사민당 당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지하 조직을 이끌었던 슈마허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다. 이렇게 슈마허를 중심으로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사분오열하던 모습에서 환골탈태하여 강한 결속력과 조직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편 앞서 언급된 것처럼 사민당 수뇌부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폭력 운동에 동의하지 않아 공산당과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데다가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세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경계하게 되었다. 때문에 서독 사민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따르는 사회주의 정당을 추구하면서도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소련]]을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사민당은 사회주의자로서 미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 독일의 자결권을 주장하면서 연합군 국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워낙에 연합군에 대한 비타협 노선을 견지한터라 심지어 독일 신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독일 민중의 기본권 추가 확대를 주장하며 반대표를 행사하라고 당원들에게 종용할 정도였다.] 사민당은 서독이 공산진영, 자유진영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중립국을 추진했다. 아울러 사민당은 중립국 서독의 경제 체제로 모든 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소련의 공산주의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했다. 연합군의 군정이 끝난 후 최초의 서독 민간인 정부 구성을 위해 치러진 [[1949년]] 제1회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사민당은 [[CDU/CSU|기민-기사 연합]]에 이어 제2당 자리를 차지했다.[* 엄밀히 말하면 사민당은 기민당보다 많은 득표를 올렸지만, 기민당과 기사당은 의회에서 같은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자매 정당으로 기사당은 바이에른주 밖에는 후보를 내지 않고, 기민당 역시 바이에른주에는 후보를 내지 않는 관계였다. 독일 의회는 철저히 교섭단체 단위로 돌아가며 독일 의회에서 교섭단체는 하나의 정치단위로서 단일 정당이나 거의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슈마허는 이때 중공업 국유화 및 계획경제 채택을 주장하고, 미국의 [[마셜 플랜]]을 비난하는 동시에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을 ''''제5의 점령국''''[* 쉽게 말해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연합군들의 똘마니라는 비칭이다.]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는데 이게 서독 국민들의 외면당하고 말았다. 슈마허는 서독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지대로 남아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와 사민당이 내세웠던 산업 국유화 및 계획경제 도입은 중립지대가 아니라 사실상 공산권 국가들과 같은 경제체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므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중립을 취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상당수의 사람들은 결국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해 중간 단계로 내세우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사민당이 주장하는 서독 체제는 결국 소련과 큰 차이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 경제체제인데 결국 그렇다면 동독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성국가가 될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고, 결령 슈마허와 사민당이 주장하는 대로 소련과 동맹을 맺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면 결국 서방, 공산진영 양측에서 모두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련이 독일 전지역 총선안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1949년 미영프 3개 점령 지역, 즉 서독 지역에서만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이미 연합군 군정기에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질서가 서독에 자리잡은데다가, 전후 복구와 [[베를린 봉쇄]]로 현실화되는 [[냉전]]기 소련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서독 국민들은 기민련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중도 보수 정당에 많은 표를 주었고, 결국 기민-기사 연합을 중심으로 자유민주당, 독일당 등이 연정을 구성하여 기민당수 [[콘라트 아데나워]]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선거 결과 기민-기사 연합이 139석, 사민당이 131석을 차지하였고, 기민-기사 연합은 자민당, 독일당 등 다른 중도 보수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했다.] 이렇게 쓰라린 패배를 겪었지만 이후 독일의 제1야당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노동당(영국)|노동당]], [[프랑스]] [[사회당(프랑스)|사회당]]과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축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1952년]]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슈마허가 [[뇌졸중]]으로 급사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거기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부흥이 계속되면서 아데나워 총리와 기민련의 위세는 더할 수 없이 높아졌고 사민당은 에리히 올렌하워가 새로운 당수로 취임한 뒤 치른 두번의 총선에서 기민련-기사련 연합에게 2연속으로 대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결과가 이렇게 되자 자기들도 케케묵은 [[마르크스주의]]로는 결코 집권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특히 당시 경제장관이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주창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 이론이 결정적이었는데, 국가의 기본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이고, 경제 운용에 있어서 되도록 시장의 원리와 민간기업에 맡기지만, 공정한 시장 질서의 확립이나 각종 복지 및 사회보장 제도에 있어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으로 오늘날의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이론을 기민련이 빠르게 채택하면서 사민당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대중정당으로 변모하는 대변화를 시도했다. 이데올로기의 수호보다 대중의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를 더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도 서독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기세에 눌려 만년야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